노자의 지혜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년)가 젊은 시절 노자를 방문해 예(禮)에 관해 물었다고 한다. 그것이 “공자문례(孔子問禮)”라는 고사이다. 훗날, 공자는 그때 만남을 회상하며 노자를 “용처럼 변화무쌍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노년의 노자는 검푸른 소(靑牛)를 타고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을 지나 서쪽으로 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여 지금까지도 전통회화의 주요 소재로 쓰인다. 한편, 이때 함곡관 문지기인 윤희(尹喜)가 부탁해서,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5,000여 자를 써줬다고 한다. 그래서 『도덕경』 이외에 『노자(老子)』 또는 『5천언(五千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우리는 노자(老子)와 함께 장자(莊子, 기원전 369?~기원전 286년)라는 사람이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사상가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노장사상”이란 표현도 자주 쓴다. 후대에 이 도가의 사상은 소수 지식인의 사상에서 아주 인기가 많은 대중적인 사상으로도 발전한다. 그런 발전을 선도했던 지식인 중 널리 알려진 사람이 아마도 위(魏)나라의 요절한 천재 왕필(王弼, 226~249년)일 것이다. 그가 쓴 주석서 『노자주(老子注)』는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후, 도가는 국가가 공인한 종교, 도교(道敎)로 발전하면서 그들에 대한 평가도 더욱 격상된다. 노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는 ‘신’으로, 장자는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신선’으로 숭배받았다.
그렇다면 노자의 사상이 역대 왕조의 황제들, 수많은 지식인과 대중들의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 모두를 끌어당긴 매력은 아마도 노자가 남긴 『도덕경』의 말 자체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노자가 남긴 『도덕경』의 말을 간명하게 드러낸 표현이 “자연무위(自然無爲)”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위자연이라 함은 ‘사람의 인위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노자가 지향하고 도달한 어떤 높은 수준의 경지를 말한다. 어느 한 시대에는 노자와 그의 『도덕경』이 제왕의 훌륭한 통치술로도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황로학(黃老學)”이 그것이다. 황제(黃帝, 전설적인 5제 중 1인)와 노자의 학문이라는 의미이다.
읽다 보면 『도덕경』의 모든 구절이 하나하나 새롭게 다가와 가슴에 닿을 것이다. 그렇게 『도덕경』은 지난 2,500여 년을 전해 내려오면서 중국 역사상 이름을 남긴 철학가, 정치가, 문학가, 군사가는 물론 평범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도덕경』을 읽으며 현실의 지혜를 얻은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이젠의 경구 풀이 형태의 책들과 달리 구절에 해당하는 다양한 경전 사례를 수록했다. 저자는 단지 도교 경전의 경구 풀이가 아닌 현실의 지혜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고 밝힌다.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최고의 책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으로 생졸년은 모두 미상이다. 춘추시대 말엽 초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주나라에서 오늘날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에 해당하는 수장실守藏室 사관을 지냈다. 이후 주나라가 쇠락하자 벼슬을 버리고 떠나던 중, 노자의 비범함을 알아본 함곡관 수문장 윤희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자』를 썼다. 『노자』는 상·하편 5,000여 자의 짧은 분량이지만 우주론, 인생철학, 정치·군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아 후대에 널리 영향을 끼쳤다. 노자가 도를 닦으며 심신을 보양한 삶을 산 덕에 장수했다고 전해질 뿐, 그 외 은둔 길에 오른 이후의 종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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