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도 처벌하지 않았다 - 혐오와 처벌, 정의와 기억의 관점에서 다시 쓴 블랙리스트의 역사
“역사는 언제나 망각이 아닌 기억의 편에서 정의를 구현한다!”
‘집행유예’와 ‘혐의 없음’으로 종식되려는 블랙리스트 사태를 고찰한
한 역사학자의 집요하고 꼼꼼한 역사적 투쟁의 기록
2016년 겨울,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화마처럼 대한민국을 휩쓸었을 때, 우리는 그 비상식의 그늘 밑에서 김기춘과 조윤선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민주공화국의 꼭대기에 누구도 알지 못한 자격미달의 통치자가 있었다는 일도 경악할 일이었지만, 그 하수인의 목록에 김기춘과 조윤선의 이름이 오른 것은 너무나 기묘했다. 유신헌법의 설계자이자 이 사회 최고 권력층의 자리에서 단 한 번도 위치를 달리한 적이 없는 인물 김기춘과 숱한 1호 타이틀의 주인공이자 '실세 장관' 조윤선이 그저 대통령의 지인에게 그토록 철저하게 맹종했다는 것은 분명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드러난 9,473명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명단은 과연 그 정권의 민낯이 얼마나 뻔뻔하고 과감했는지 보여줬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 자랑하는 듯한 광범위하고 무분별한 검열은 지원금 배제 등의 형태로 치졸하게 자행됐고 이로 인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지난한 생존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투쟁은 광장의 촛불로 이어졌고 결국은 합리적인 시민의 힘이 승리한 듯 보였으나 거기서 끝이었다.김기춘과 조윤선이 받은 형벌은 각각 3년형과 집행유예였을 뿐지만(1심) 왜 이들의 형량이 이토록 가벼운지를 궁금해하는 이들은 없다. 왜 매번 우리의 투쟁은 모여서 분노하는 데 그치는 것일까. 왜 우리는 그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는 데에까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누구도 처벌하지 않았다》(위즈덤하우스, 2019)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과 무관한 역사학의 논의에서 벗어나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서의 역사를 고민하는 한 역사학자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이다. 저자 심용환은 오늘의 현실은 과거의 대한민국사를 압도할 만큼 새로우며,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역사가는 '현대사'가 아닌 '현재사'로서 블랙리스트 사태에 응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몇 개 기사의 헤드라인을 훑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의 해답이 진지하고 냉철한 복기 안에 숨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책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의 주범인 김기춘을 '현재사의 인물'로서 기술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의 전범 도조 히데키를 비교 분석의 대상으로 소환한다. 또한 조윤선과 김종덕 전 문화체육부장관의 맹종을 이해하기 위한 대상으로 히틀러 시대의 철저한 문화예술계 추종자인 알베르트 슈페어를 비교한다. 흡사 데칼코마니와도 같은 이들의 양태는 같은 선택을 할 때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며,동시에 정당한 처벌 없이 진보하는 사회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위의 결과에 따라 처벌은 달라야 한다
드레퓌스 사건과 스페인 내전을 통해 바라본 정당한 처벌과 기억의 문제
책은 드레퓌스라는 유대인 병사를 간첩으로 몰아세웠던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광기와 자성의 모습을 통해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유대인은 간첩'이라는 집단 최면에 빠진 당시 프랑스 사회의 모습은 블랙리스트 사태 직전 대한민국의 모습과 유사하다. 언론은 선동적으로 가짜 뉴스를 양산하고 국민 다수가 이들 선동에 무비판적으로 휘말려 이성적 판단을 배제한 채 혐오와 증오의 대상을 선택한다.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피해자가 입은 고통에 대해선 함구하며 무엇보다 가해자 처벌의 문제는 철저하게 외면한 것이다. 피해자의 삶은 철저하게 망가졌지만 어떠한 처벌도 없으므로 누구도 가해자가 되지 않는 현실은, 1890년대 드레퓌스가 겪었던 일인 동시에 2018년의 대한민국 문화예술계가 겪은 일이기도 하다.
책은 블랙리스트 사태에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가담했던 이들의 처벌에 관해 문제제기한다. 김기춘과 조윤선은 정당한 처벌을 받았는가? 상부의 지시를 받아 하부에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을 명령한 고위 공무원들의 처벌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그저 말단에 있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처벌의 문제에서 자유로운가? 저자는 과거 친일을 해도 독재를 해도 범법을 저질러도 면죄부를 줬던 우리 역사의 과오를 되짚으며, 처벌이 없는 역사의 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울러 스페인 내전 당시 양 진영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서로 '망각'하기로 합의한 뒤 발생한 거대한 사회적 혼란을 거론하며, 갈등을 감내하더라도 끊임없이 기억하고 문제제기하는 사회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음을 역설한다.
철학의 어깨 위에서 조망한 관점이 있는 역사
대안을 제시하는 네비게이터로서의 네 가지 철학 이론
책은 모든 장의 말미에 각 장의 주제를 좀 더 깊이 있게 해석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블랙리스트의 탄생과 인간 심리를 추적한 1장에서는 주디스 슈클라의 《일상의 악덕》을, 권력에 맹종하는 관료사회를 꼬집은 2장에서는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부조화 이론》을, 부역자 처리에 관한 처벌 문제를 제기한 3장에서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기억의 문제를 거론한 4장에서는 비어트리스 웹과 시드니 웹의 《산업민주주의》의 이론을 들어 각 장에서 주장하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 지점을 돌파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자칫 대안 없는 비판으로 그칠 수 있는 책의 논지가 탄탄하게 보완되었으며,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단순한 보고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제된 인문서를 읽는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소장. 1996년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학과에 들어갔다. 돌을 던져야 할 독재자는 없었고 선배들은 관성처럼 마르크스를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는 질적 기반이 필요한데 그에 대한 답은 인문학이라는 확신으로 15년간 대학생 인문학 공동체 ‘깊은 계단’을 이끌었다. 국정 교과서 사태로 잘못된 정보가 SNS를 통해 퍼져나갈 때, 카톡 유언비어 반박문으로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아 화제가 되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역사 대중서 《역사 전쟁》, 《단박에 한국사-근대편》,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 토크》로 주목받았고,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 CBS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tvN <어쩌다 어른>, JTBC <말하는대로> 등 언론과 방송에서도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독창적인’ 글쓰기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 있다.
추천사
서문 | 블랙리스트의 역사는 응전을 요구한다
1장 악의 탄생: 블랙리스트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변명: 도조 히데키의 자기합리화
블랙리스트라는 칼춤: 김기춘
[철학의 어깨 위에서] 잔혹성, 위선, 속물근성, 배신, 인간혐오에 관하여: 주디스 슈클라의 《일상의 악덕》
2장 맹종하는 공무원: 관료는 왜 권력에 순응하는가?
히틀러의 블랙리스트 사업 그리고 슈페어
장관 김종덕과 조윤선: 문화예술계라는 진상품
[철학의 어깨 위에서] 타당하지 않은 신념 유지하기: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 《인지부조화 이론A Theory of Cognitive Dissonance》
3장 정의로운 처벌에 관하여: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 필요한 것들
19세기 프랑스의 실패: 드레퓌스 사건
혼란: 부역자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철학의 어깨 위에서] 잘못을 반드시 처벌해야 하는 이유: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Leviathan》
4장 기억의 가치: 블랙리스트, 어떻게 곱씹어야 할까?
스페인 내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억이 현실이 되는 법: 문화예술인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다
[철학의 어깨 위에서 ] ‘단위’를 만드는 법: 비어트리스 웹Beatrice Webb, 시드니 웹Sidney Webb의 《산업민주주의 Industrial Democracy》
결론 의지의 집합이 동력이 되어
참고도서, 보고서 및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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