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는 그 자리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삭상, 이수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작가 이혜경,
육 년 만의 신작 소설집
그런 날들이 있다. 그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해 스스로를 그늘 안에 가둔 날들. 그것은 때로 무사한 일상에 날아든 뜻하지 않은 사고가 아니라, 어느새 한켠에 자리를 잡아 우리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늘이기도 하다. ‘무사’하지만 ‘안녕’하지는 않은 날들의.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틈새』(창비, 2006) 이후 육 년 만의 작품집을 들고 돌아온 작가 이혜경의 소설은, 이런 일상의 한가운데서 문득 건네받는 안부인사와도 비슷하다. 작가의 밝은 눈은, 우리 안의 그늘과 상처와 허기를 미리 보고 더듬어, 오히려 우리를 조용히 무너뜨린다. 하루하루가 다르지 않은 일상, 잠들기 전이면 또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에 가슴 쓸어내리는 동시에, 또 이렇게 하루가 지나가는구나, 한숨 쉬는 날들.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 위에 드리워진 그늘 안에서 우리는 늘 흔들리고 불안하다.
이런 ‘무사’한 하루중에 누군가 문득, 당신 잘 지내요? 안부를 물어오면, 우리는 때로,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싶다. 그제야 우리가 ‘안녕’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아무 멋부림 없이, 섣부른 위로의 몸짓 없이 툭툭 던져져 있는 작가의 문장들은 어떤 '틈새'를 드러내고 '파문'을 만든다. 그것은 결국 호수의 저 끝까지 닿은 뒤에야 다시 고요한 수면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무사’한 일상을 흔드는 모든 불가항력을 깨닫게 함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위로한다.
이혜경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슬픔의 힘은 그녀의 소설을 이끄는 순정성의 미학에서 비롯한다. 요컨대 그녀의 소설에서 배어나오는 슬픔은 그녀의 소설이 지나치게 착하다는 점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늘진 삶의 구석구석을 애정어린 시선과 정교한 필치로 형상화해온 대표적인 여성작가인 그녀는 더디지만 탄탄하고 뚜렷한 행보를 걸어왔다.
1960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으며,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세계의 문학>에 중편소설 『우리들의 떨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혜경의 소설은 가족을 둘러싼 내력을 작중화자의 자전적 회고를 통해 서술하는 가운데 슬픔과 절망의 서정을 체념이나 화해로 이끌어간다. 현재시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대개 과거의 사건들을 보고하게 하거나 자아와 세계에 대한 반성을 촉발시키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 이혜경의 소설에서 회상되는 사건들은 현란하거나 새롭기보다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런 만큼 과거를 회상하는 시선의 성격과 회상의 현재적 효과에 큰 비중이 주어진다.
1995년 장편소설 『길 위의 집』으로 오늘의 작가상과 독일 리베라투르 장려상을 받았으며 『피아간』으로 13회 이수문학상을, 『틈새』로 2006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그 집 앞』『꽃그늘 아래』등이 있다.
너 없는 그자리
한갓되이 풀잎만
북촌
그리고, 축제
감히 핀 꽃
금빛 날개
꿈길밖에 길이 없어
검은 강구
해풍이 솔바람을 만났을 때
해설 앎이라는 비극, 살이라는 축제_조연정(문학평론가)
작가의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