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즐겨야 산다

즐겨야 산다

저자
박진석 지음
출판사
레몬북스
출판일
2016-03-06
등록일
2017-01-19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9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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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랑의 반감기半減期는 영원이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주노 디아스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거칠면서도 섬세한 유머로 그려내는 9가지 사랑의 민낯


+ 2012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
+ 2012 <퍼블리셔스 위클리> 최고의 책
+ 2012 <뉴욕 타임스> 주목할 만한 100권의 책 + 2012 굿리즈 초이스 상 최종 후보
+ 2012 스토리 문학상 최종 후보 + 2013 앤드루 카네기 메달 상 최종 후보
+ 2013 <선데이 타임스> 단편 소설상(「미스 로라」) 수상

“그때 나는 끝났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가 바로 끝이다.”
― 언제나 맞닿아 있는 사랑의 끝과 시작


“냉정한 저널리스트의 눈과 시인의 혀를 지닌 작가”(뉴스위크), “스타일과 위트의 승리”(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넘치는 생명력과 에너지”(닉 혼비), “역동적이고 터프하면서도 아름답다”(프랜시스코 골드먼)……

차가운 동시에 뜨겁고, 거칠면서도 섬세한 양가적(兩價的) 면모, 그리고 ‘스타일’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되는 특유의 속도감 있고 간결한 문체. 이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2008년 퓰리처상과 전미비평가협회상을 거머쥐며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한 주노 디아스의 작품세계를 이야기할 때면 어김없이 거론되는 두 가지 특징이다. 그의 작품을 십여 페이지 정도만 읽어보아도 어렵지 않게 눈에 띄는 이 확연한 특징들에 한 가지 부록을 보태본다면, 독자들에게 오랜 기다림을 안기는 작가라는 점을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2012)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2007) 이후 5년 만에, 주노 디아스가 자신의 소설적 자아(alter ego) ‘유니오르’와 함께 돌아온 신작 소설집이다.

2010년 한국 방문 당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주노 디아스는 “평생 장편을 세 편쯤 쓰면 성공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천천히, 완벽하게 쓰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출간 직후 영국의 어느 매체와 이뤄진 인터뷰에서도 다소 길었던 공백을 의식한 듯, 이렇게 토로한다.

“좀더 빨리 쓸 수 있을 거라고, 나 역시 늘 그렇게 생각했어요. 해마다 작품 하나씩은 내놓게 될 줄 알았죠. 하지만 현실은 달라요. 리듬은 어디까지나 리듬이니까. 저 망할 우주는 결코 내 스케줄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요. 시간이 드는 일이라면, 필요한 만큼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거든요. 완성하기까지 5년이 걸렸지만, 몇몇 이야기들은 10년도 넘게 품고 있던 것들이죠.”

5년 만의 신작에서도 “문학적 수사와 거리의 언어를 힘 있게 버무리는 솜씨”(오프라 매거진)는 여전하고 유머는 한층 간결해졌다. 리듬감 있게 연속으로 잽을 날리다 그 리듬에 익숙해져 잠시 마음을 놓을 즈음 결정적인 펀치로 커다란 감정의 낙차를 경험하게 하는 구성의 힘에서는 노련미와 정확함이 느껴진다.

데뷔 소설집 『드라운』(1996) 이후 11년 만에 펴낸 두번째 작품이자 첫 장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단숨에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오랜 기다림에 대한 독자와 평단의 반응은 뜨거웠다. 출간되자마자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2012년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 2012년 스토리 문학상 최종 후보, 2013년 앤드루 카네기 메달 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수록작 9편 중 「미스 로라」는 2013년 <선데이 타임스> 단편 소설상을 수상했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서는 화자로 등장했고, 『드라운』에서는 수록 작품들마다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전체 수록작 10편을 하나의 ‘연작소설(주노 디아스 스스로는 “linked story”라고 표현)’ 혹은 ‘옴니버스’로 완성되게 한 ‘유니오르’가 이번에도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반갑게도 『드라운』에 등장했던 형 라파의 사정들이 보다 자세히 그려지고, “아버지란 가늠하기 어려운 존재다”(「겨울」)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아버지 라몬, 가늠하기 어려운 아버지 곁에 그림자처럼 머무는 어머니 비르타, 유니오르와 라몬 형제의 껄렁한 동네 친구들 등 주노 디아스의 독자들에게는 어딘지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9편의 단편들은 시종일관 ‘사랑의 끝’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낱낱이 펼쳐놓는 데 집중한다. 데뷔작 『드라운』이 상대적으로 유니오르의 방황과 성장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는 시종일관 ‘사랑’인 셈이다. 여느 사랑 이야기들과 다른 점이라면,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키워나가는 과정에 대해서가 아닌, 어떻게 사랑이 끝나는가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사랑’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한 ‘이별’의 얼굴들에 대해. 그리고 주노 디아스 스스로 “시간이 드는 일이라면, 필요한 만큼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상실과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필요한 시간에 대해, 언제나 맞닿아 있는 사랑의 그 끝과 시작이 다시 하나로 이어지기까지의 시간에 대해, 영원에 버금가는 사랑의 ‘반감기(半減期)’에 대해.

그때 나는 끝났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가 바로 끝이다. | 43쪽, 「해와 달과 별들」

-

너는 네가 아는 모두에게 물어본다. 잊는 데 보통 얼마나 걸려?
공식은 여러 가지다. 사귄 햇수 곱하기 일 년. 사귄 햇수 곱하기 이 년. 그냥 의지력 문제다. 끝났다고 네가 결정하는 날 끝나는 거지. 절대 잊히지 않아. | 280쪽,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

5년 만의 신작 소설집으로 독자들을 찾아온 주노 디아스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 이별을 쓰는 방법을 택했다. 전작에 대한 경험과 상관없이, 주노 디아스의 ‘익숙함’이, 그리고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가 ‘새로움’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다.

*

사랑이 시작되는 이유들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처럼, 사랑이 끝나는 이유 역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의 주인공 유니오르가 ‘사랑의 끝’을 맞이하게 되는 이유는 얼핏 간결해 보인다.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주노 디아스는 ‘유니오르’를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연작소설을 구상한 이유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한다. “바람둥이의 부침(浮沈)에 대해 써보고 싶었고, 형의 암(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고. 크게 이 두 가지 범주의 이야기들이, 주노 디아스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이민사회의 일상과 정서를 배경으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결과적으로 ‘스팽글리시(Spanglish)’의 세계로 요약되는 이민사회라는 배경이 세번째 범주를 이루는 셈이다.

“난 나쁜 놈이 아니다.”
― 「해와 달과 별들」 「알마」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


난 나쁜 놈이 아니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방어적이고 뻔뻔스럽게 들리겠지―알지만 사실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 나약하고 실수투성이지만 근본은 착한 놈이다. 하지만 마그달레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 13쪽, 「해와 달과 별들」

잠시 바람을 피웠던 상대인 카산드라의 편지가 도착하면서 여자친구 마그다(마그달레나)와의 사이가 삐걱거리게 된 유니오르. 마그다의 멀어진 마음을 돌리기 위해 떠난 도미니카 여행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들려주는 첫 단편에서 유니오르는 이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난 나쁜 놈이 아니다.”

유니오르, 너에게는 알마라는 여친이 있어. 말처럼 길고 여린 목에, 청바지가 터질 듯 사차원으로 존재하는 것만 같은 빵빵한 도미니카 엉덩이. 달마저 궤도 이탈시킬 그런 엉덩이. 널 만나기 전엔 결코 그녀 스스로 맘에 들어한 적이 없는 엉덩이. | 69쪽, 「알마」

이번에는 편지는 아니고, 일기장이다. 상대는 락스미라는 이름의 기아나 출신 신입생. 버겐라인(뉴욕과 뉴저지 사이의 히스패닉 거주 지역) 토박이에, 여행지의 해변에서는 단숨에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던 마그다가 평균적인 글래머였다면, “말처럼 길고 여린 목”선의 알마는 “청바지가 터질 듯 빵빵한 도미니카 엉덩이”다. “달마저 궤도 이탈시킬 그런 엉덩이”를 여자친구로 두었던 유니오르는 “예쁘장한 신입생하고 붙어먹”었고, 그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그리고 알마를 잃는다. 떠나는 알마를 향한 유니오르의 한마디, “베이비, 이건 내 소설의 일부야.”

난 괜찮아, 너는 말한다. 메호르 케 눈카(그 어느 때보다 더 좋아).
하지만 너는 괜찮지 않다. 뉴욕 시에 있는 공통의 친구를 모두 잃었고(모두 그녀에게로 갔다), 어머니는 그 일 뒤로 너와 말을 하지 않으려 하고(어머니는 너보다 약혼녀를 더 좋아했다), 너는 끔찍하도록 죄책감을 느끼고 끔찍하리만치 혼자다. | 239쪽,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

이번에는 마그다도, 카산드라도, 알마도, 락스미도 아닌, 그냥 ‘여자’다. ‘여자’는 유니오르의 ‘약혼녀’이다. 하마터면 약혼할 뻔했던 “겁나 오픈 마인드”였던 ‘블랑키타’도 이름이 등장하는데, 정작 실제 약혼녀는 ‘여자’ 아니면 ‘그녀’로만 호명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메일이었다. “이메일 휴지통을 한 번도 안 비운” 덕에, 육 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이뤄져온 오십 명과의 ‘바람’을 ‘그녀’에게 걸리고 말았다. ‘여자’는 떠나고, “난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정작 괜찮지 않은, 유니오르의 5년여에 대한 기록이 성실하게 이어진다.

그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다고 너는 생각한다. 틀렸다. 기말고사 기간에 우울이 엄습하는데, 이름조차 없을 거라 여겨질 만큼 너무 깊은 우울이다. 마치 원자 단위로 서서히, 집게로 찢어놓듯 해체되는 느낌이다. | 239쪽,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

‘그녀’와 함께 살던 뉴욕 집에서 나와 “한번도 살고 싶은 적이 없었던 보스턴”으로 돌아가지만 무뚝뚝한 주민들 분위기도, 심심하면 들려오는 인종주의적 사건 소식도, 입에 맞는 사천식 음식을 파는 식당을 찾기 힘들다는 점도, 하나같이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여자들을 만나려고 노력해보지만 생각같이 되지 않고 자꾸 어긋나기만 한다. 여자 만나는 일을 잠시 접고 휴식을 취하며 일과 글쓰기로 돌아가려 애쓰기로 하는 유니오르. 소설 세 권을 시작하고, 강의에 대해서도 진지해지고, 건강을 위해 달리기도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족저근막염이 생겨 더이상 달리기도 못하게 되고, 혹시나 하고 시작해본 요가에 의외로 빠져들면서 이 “괜찮지 않”은 일상도 잠시나마 새로운 리듬을 찾아가나 싶지만, 요가 도중 허리가 삐끗하며 추간판탈출증 진단을 받는다. 그사이 사귀고 있던 어린 법대생은 허리가 망가진 유니오르를 떠났다가 어느 날 또 갑자기 말도 없이 나타난다. 임신 소식과 함께. 법대생은 막무가내로 출산일까지 유니오르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게 되고, 친구 엘비스는 삼 년 전 도미니카에 갔다가 그곳에서 얻은 아들이 있다는 비밀을 그제야 유니오르에게 털어놓으며 아들을 보러 도미니카에 함께 가자고 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너는 키 큰 여자를 만난다. 너는 의사들을 좀더 만나러 간다. 너는 알레니의 박사논문 시험 합격을 축하한다. 그리고 유월 어느 날 너는 엑스의 이름을, 그리고 이 말을 갈겨쓴다. 사랑의 반감기半減期는 영원이다.
너는 두어 가지를 더 끼적댄다. 그러곤 고개를 푹 숙인다.
다음날 너는 새 페이지들을 본다. 처음으로, 불태워버리거나 글쓰기를 영원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너는 방에 대고 말한다. | 282쪽,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

약혼녀가 떠나고 난 뒤 1년차, 2년차…… 5년차까지 이어지는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의 기록은 한마디로 ‘뜻밖의 연속’으로 정리되지만, 어쩐지 이 모든 기록의 방점은 ‘사랑’에 찍힌다. “원자 단위로 서서히 집게로 찢어놓듯 해체되는 느낌”의 절망과 우울에 몸과 마음이 온통 푹 담가졌다 돌아온 이 ‘바람둥이’ 유니오르는 지난한 ‘사랑의 끝’에서 다시 사랑의 ‘시작’을 생각한다.

“가끔 형이 보고 싶어.”
― 「닐다」 「푸라 원칙」 「미스 로라」


2013년 <선데이 타임스> 단편 소설상 수상작이기도 한 「미스 로라」는 이렇게 시작된다.

수년 뒤에 너는 생각한다. 형 때문이 아니었어도 네가 그랬을까? 다른 남자들은 다들 그녀를 맘에 안 들어했던 걸 기억한다. 쿨로도 찌찌도 없이 깡말랐었지만 형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걸. 그 여자, 나라면 따먹겠어. | 201쪽, 「미스 로라」

1985년 열여섯 살의 유니오르. 여자친구 팔로마는 절대 잠자리를 해주지 않고, 이웃의 미스 로라가 유니오르에게 관심을 보인다. 보디빌딩으로 다져진 깡마른 몸매의 독신 여성, 직업은 교사. 어느 날 밤 유니오르는 “아버지의 아들이자 형의 동생답게” 미스 로라의 아파트를 찾아간다. 그후로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겠다고 마음먹지만 몇 년간 그녀와의 관계가 이어진다. 러트거스 대학에 입학하고서야 간신히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내지만, 또래 여자들을 만나는 것이 순조롭지 않다. 마침내 유니오르는 대학을 졸업하게 되고, 대학 졸업식에 붉은 드레스를 입고 다녀가는 미스 로라를 발견한다.

형이 남긴 말이 아니었다면, 과연 형의 동생답게 미스 로라를 찾아가 그렇게 관계가 시작되었을까라는 자문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미스 로라를 추억하는 동시에 이따금 형에 대한 기억을 환기한다.

그녀는 자꾸만 내게 형에 대해 말을 하게 하려 한다. 말하는 게 도움이 될 거야, 그녀의 말이다.
할말이 뭐가 있어요? 암에 걸렸다, 죽었다.
그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 220쪽, 「미스 로라」

-

너는 또 자고 간다. 새벽에 그녀의 아파트에서 빠져나와 네 방 지하 창문으로 들어간다. 어머니는 전혀 눈치를 못 챘다. 옛날에는 뭐든 다 알았다. 캄페시노(시골 사람)다운 레이더가 있었다. 이제 어머니는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었다. 슬픔, 슬픔에 대처하는 데 시간을 다 할애하고 있다. | 221쪽, 「미스 로라」

유니오르가 먼저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형의 애인이 되어버려 마음을 접어야 했던 ‘닐다’와의 이야기에서도, 둘은 우연히 마주친 빨래방에서 함께 라몬을 추억한다.

고작 여름 한철이었고 그녀가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이 모든 게 다 뭐란 말인가? 형은 갔는데, 형은 갔는데, 형은 갔는데. 나는 스물세 살이고 언스톤 로드에 있는 작은 쇼핑몰의 빨래방에서 옷을 빨고 있다. 그녀가 여기 나와 같이 있다. 자기 빨래를 개면서 생글거리며, 이가 빠진 휑한 자리를 드러내 보이며 말한다. 참 오랜만이다, 그렇지, 유니오르? | 63쪽, 「닐다」

-

가끔 형이 보고 싶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야. 나한테는 좋은 남자였어.
그녀가 수건을 홱 펼치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꼴을 보니 내 얼굴에 못 믿겠다고 쓰여 있었나보다. 나한테 제일 잘해준 사람이야.
닐다.
내 머리카락을 자기 얼굴에 덮고 자곤 했어. 그러면 안전한 기분이 든다고 했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 64쪽, 「닐다」

라파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한 마지막 몇 달간의 기록인 「푸라 원칙」은 수록작 9편 중 가장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스타일로 손꼽을 만하다.

내가 자기 모나크를 운전하는 동안 라파는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 지금 죽어가는 거 같아, 그가 말했다.
죽어가는 거 아니거든? 하지만 진짜 골로 갈 거면 이 차는 나한테 줘라, 알았지?
내 애마는 아무한테도 안 줘. 이 안에 탄 채로 묻힐 거야.
이 똥차에?
넵. 내 티브이하고 권투 글러브도.
뭐 파라오냐?
그는 허공에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넌 노예니까 트렁크에 묻혀라. | 138~139쪽, 「푸라 원칙」

유니오르의 사랑의 끝과 시작의 시간 어딘가에 그렇게 내내, 형이 스며들어 있다. 바람둥이 유니오르가 형 라파를 추억하는 공통분모로 묶을 수 있는 이 일련의 작품들은, “거친 것은 표면일 뿐, 표면 아래에는 상처가 있고 문제 제기가 있습니다”라는 상찬과 함께 캐나다 총리에게 주노 디아스의 작품을 추천했던 작가 얀 마텔의 표현에 가장 맞춤하다.

“똑바로 가는 게 더 쉽지.”
― 「오트라비다, 오트라베스」 「플라카」 「겨울」


카리브 해의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영원한 주변부’인 뉴저지의 히스패닉 거주지에서 여느 이민자처럼 고된 성장기를 거친 청년 주노 디아스가 ‘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뉴요커> <패리스 리뷰> <베스트 아메리칸 쇼트 리스트> 등에 단편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렇게 모아진 단편 10편을 묶어 펴낸 데뷔작 『드라운』을 여는 발문으로 주노 디아스는 쿠바계 미국 시인이자 소설가인 구스타보 페레스 피르마트의 짧은 글을 선택한 바 있다.

“내가 당신에게 영어로 글을 쓴다는 것부터가 내가 말하려는 바를 왜곡하는 것이다. 나의 주제는 이것이니까: 내가 영어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다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지만.” | 구스타보 페레스 피르마트

그리고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주노 디아스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속한 사람들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람들‘에게’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아프리카와 도미니카에 닿아 있는 나의 뿌리, 어린 시절 경험한 가난이 극복해야 할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당구장 테이블을 치우고 신문 배달을 하는 육체노동에 전념하고, 저녁 6시부터 밤 10시까지 대학 수업을 들으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선 매일 세 시간씩 글을 쓰려고 노력했던, 하루 네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는 생활을 8년 동안 계속했던 작가. 그 역시 여느 이민자와 다름없는 ‘일의 세계’를 살았다. 이런 그에게 가족과 친구, 이웃, 커뮤니티 등으로 요약되는 ‘스팽글리시’의 세계가 그의 모든 “스토리텔링과 언어에 대한 애정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추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백인’ 여자친구와의 짧은 기억을 기록한 「플라카」, 병원 세탁실 관리감독관으로 일하면서, 고국 도미니카에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온 남자 ‘라몬’과의 사랑을 이어나가는 야스민에 대한 이야기 「오트라비다, 오트라베스」, 그 ‘라몬’이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두 아들 라파와 유니오르를 마침내 미국으로 데려온 이후의 이야기 「겨울」. 이 세 편은,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로 대표되는 ‘수시오(난잡한 놈)’ 이야기와 형 라파의 암 발병과 죽음에 관한 기억들 사이에서 단연 시처럼 반짝이는 서정성을 보여주는 수작들이다.

아나 이리스가 언젠가 내게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산토도밍고 옛날 집의 전등 얘기를 했다. 그 불빛이 얼마나 깜빡였는지, 과연 저 불이 꺼질지 안 꺼질지 알 수 없었다고. 우리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불이 마음의 결정을 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고. 내 감정이, 나는 대답했다, 꼭 그래. | 97쪽 「오트라비다, 오트라베스」

-

나는 그가 그녀를 그리워하는 조짐을 찾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돼, 아나 이리스가 내게 말한다. 그런 생각은 떨쳐버려. 그런 생각 때문에 미쳐버리고 싶지 않으면.
그것이 아나 이리스가 이곳에서 생존하는 방법이자 아이들을 생각하면서도 정신을 놓아버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부분적으로는 이곳에서 지내는 우리 모두의 생존법이기도 하다. | 98쪽 「오트라비다, 오트라베스」

하지만 다분히 자전적 소재들을 활용했음이 분명해 보이는 일련의 작품들에 대해, 주노 디아스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독자들의 ‘비판적 시선’을 주문한다.

“누군가의 회고록 혹은 자서전이 정말 ‘진짜’인가 하는, 그런 회의적 시선이 요즘은 팽배해요. 하지만 논픽션만이 아니라, ‘픽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이게 ‘진짜’ 지어낸 이야기인가 하는 회의적 시선이 똑같이 픽션을 향해 있어요.”

‘다른 생을, 다시 한번’이라는 뜻으로 옮겨지는 단편 제목 「오트라비다, 오트라베스」과 관련해 옮긴이가 작가에게 던진 질문에 대해 주노 디아스는 이렇게 답했다. “이민이란 극심한 단절을 동반하므로 한 번의 인생이 아니라 일련의 여러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우리 어디로 가야 돼요? 라파가 물었다. 눈으로 불어오는 눈발을 막으려고 눈을 엄청나게 깜빡이면서.
똑바로 가, 마미가 말했다. 길 잃어버리지 않게.
얼음에 표시를 해야겠다.
엄마는 우리 둘을 감싸안았다. 똑바로 가는 게 더 쉽지. | 198쪽, 「겨울」

한번에 일련의 여러 인생을 사는 것에 비하면, 과연 “우리 어디로 가야 돼요”라고 묻는 어린 아들들의 물음에 대한 비르타의 대답처럼, 똑바로 가는 게 더 쉬운 게 우리 인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똑바로 가는 게 더 쉽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스팽글리시의 세계 바깥 어느 곳에 있는 또다른 유니오르, 라파, 라몬, 비르타, 야스민, 아나 이리스 들에게는 이리저리 흩어지는 발걸음을 모으려 애쓰며 ‘사랑의 끝’에 대해 혹은 ‘사랑의 시작’에 대해 생각하고 아파하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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