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아기가 살짝 엿들은 말 : 실천시선 218

아기가 살짝 엿들은 말 : 실천시선 218

저자
양정자
출판사
실천문학사
출판일
2014-08-25
등록일
2015-01-29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141 Bytes
공급사
우리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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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노부부가 삶의 끝에서 마주하는 핏줄의 환희

『아내일기』, 『아이들의 풀잎노래』 등의 시집으로 일상의 감정을 세밀하게 포착해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했던 양정자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저자는 오늘날 시대의 한 풍경이 되어버린 노부부의 손자 키우기에서 느껴지는 핏줄에 대한 애착을 군더더기 없이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 생명체의 경이로운 성장에 대한 찬가

‘일상의 애환.’ 양정자 시인의 시세계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시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일상을 넘어서 시를 써본 적이 없다. 30년 세월 동안 교단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교사로서, 유명 소설가였지만 민주화 운동을 한답시고 집안일은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남편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야 했던 아내로서, 고되고도 또 고되었던 제주도 시집살이를 감내해야 했던 서울 며느리로서 순간순간의 풍경을 그려왔다. 이번 시집 『아기가 살짝 엿들은 말』에서는 자라나는 손자와 손녀의 성장과 변화에 흠뻑 빠진 할미 시인의 놀라움과 환희, 그리고 가슴 한편에 쌓아두었던 남편과 자식에 대한 애환을 교차시키며 시인의 시세계의 외연을 확장한다.

자라남의 한없는 즐거움과 아픔에 취해
쌔근쌔근, 방긋방긋, 옹알옹알, 와들랑바들랑
한 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꼼지락꼼지락, 파닥파닥 제자리 맴돌다가도
어느 틈에 훌쩍훌쩍 자라 오르는
이 놀라운 꽃나무들

(중략)

요것들 어쩌다 요렇게 생겨났을꼬?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막무가내의
그 싱그러운 나날의 피어남을 지켜보기만 해도
메마른 우리들 마음 절로 풍성해지는
꽃 중에 제일은 사람 꽃
아기 꽃들

_ '아기 꽃들' 부분

시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어디서 이 “아기 꽃”들이 자신들 앞에서 피어났는지. 다만 그것들이 명멸해가는 시인 자신의 “뿌리”를 다잡아주는 대지이자, “의지”와 “희망”의 증거이며, “활력”의 섭취로서 다가온다는 것. 그것은 시인에게 절대적인 선물, 마치 창조주의 ‘은총’과도 같다. 그것에 시인은 말 그대로 놀라움과 환희로 복종한다.
‘물아기가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듯’ 시인은 그 바람에 몸을 맡긴다. 저하고만 놀아달라고 떼를 쓰는 폭군 앞에 “어릿광대”가 되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에게 심드렁해지다 또래 아이들을 보며 “눈길 한 번 안 준 채” 달려가는 손자 손녀들에게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제 어미 아비가 절대 안 사주는 불량 식품”으로 손자 녀석을 꼬드겨야 한다는 지인의 말에 귀가 솔깃해지기도 하는 이 할미 시인은 어느새 “물아기”가 내뿜는 생의 약동과 하나가 된다.

상처와 죄스러움이라는 핏줄과 화해하기

그러나 이 늙은 할미 시인에게 생을 다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껏 숨죽여왔던 옛 기억들을 떠올려야만 하는 고통스런 자기 대면임이 드러난다. 손자 손녀를 키우며 기쁨에 몸 둘 바 모르는 자신의 이면에, 과거 자기 배로 낳은 생명이었음에도 “순간순간 밀어닥치는 잔인한 시간의 헛됨에 진저리”치고 “번민에 늘 휩싸”였던 기억이 시인의 눈앞을 스친다.

아직 부기도 덜 빠진 뚱뚱 부은 몸으로
산후 2개월부터 직장 나가야 했던 내 옛 시절
별로 믿을 수도 없던 남양 분유로 아기 키울 때
엄지손가락 유난히 많이 빨았던 내 큰아들
너무 많이 빨아 손가락이 늘 꼬치 오뎅처럼 퉁퉁 부어터져 있고
손가락 밑엔 곰팡이까지 슬었었다
직장 일에, 집안일에, 아기 키우는 일까지 늘 지쳐 있는
직장 다니는 엄마들 무슨 죄 있나
남편과 아이들 앞에 떳떳하라는 선배 언니들 충고 많이 들었지만
어릴 적 손가락 심하게 빠는 큰아들 바라볼 때마다
사춘기, 이유 없이 심통 부리고 공부 안 할 때마다
제 첫아기 키우면서, 제 아내 직장 생활 강력 반대했을 때(어린 시절,직장 다니는 제 엄마에게 얼마나 데었으면 그랬을까)
내가 느꼈던 가슴 뜨겁던 자책감
세상이 다 무너질 듯했던 어떤 열패감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지은 듯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 팍팍 쓰리다

_ '평생 죄지은 듯' 전문

민주화 운동 한답시고 집안일은 눈길 한번 안 준, “술 먹고 밖으로만 나돌던” 남편, 삶의 밭에 눈물 거름을 뿌려댔지만 “네 각씨 오줌허벅깨나 지게 생겼”다며 은근히 며느리를 못마땅해 했던 시어머니, “이유 없이 울어대고 말 안 듣고 속 썩이는” 자식 키우기의 번민. “가슴속 품은 젊을 적 꿈과 열정 삭히지 못해” “창밖으로 떨어져”서라도 도망가고 싶었던 한 때의 절망과 응어리를, 수십 년이 지나 손자 손녀의 생의 약동을 부여잡고 시인은 마주 볼 용기가 생긴다.
시인은 이제 “아기 키우는 그 어려움과 외로움을 슬쩍 감추는 딸년”을, “무쇠 연탄난로 피운 것처럼 가득 차고 따뜻했던” 남편의 다정했던 모습을, 설날 강아지 새끼들처럼 아롱이다롱이 차례상 앞에 모여 고사리 손 모으는 손자 손녀들을 앞에 둔 “영정 사진 속 시아버님”의 미소를 볼 줄 안다. 시인은 손자 손녀를 키우며 느꼈던 생의 환희, 그 약동을 통해 상처와 죄스러움이었던 핏줄과 화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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