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또 별처럼 - 전 육군참모총장 이진삼의 인생이야기
“염병할 자식, 제 집에는 계집도 없고 딸자식도 없담. 그 말버릇이 다 무엇이람.”(이광수,『흙』, 1932)
“이런 염병을 하다 땀통이 끊어질 자식이 있나!”(김유정,『따라지』, 1932)
* * *
염병이란 어휘의 의미나 어감을 애써 따질 것 없이 언어로써 자신의 심경을 거침없이 표현해내는 작가들이, 한평생 총칼을 쥐고 산 나로서는 참으로 부러웠다. 적어도 글을 쓰는 그 순간, 펜은 총칼보다 강하고 진실을 더 많이 담고 보여줄 수 있기에.
오랜 세월, 내 가슴은 묵직한 바윗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그리고 그 바윗덩이 위엔 장작더미가 차곡차곡 쌓여 시공불문 거리마다 시간마다 여차하면 언제든지 발화할 기세였다.
울다가 웃다가 하던 그때의 내 모습을 누군가 목격했다면 간단명료하게 “미쳤어!”라고 외쳤을 것이다.
1937년 2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사람은 정도正道를 걷고, 경우境遇에 틀리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 속에 성장, 중학교 2학년 되던 해 6·25전쟁을 경험한다. 북한군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후, 대한민국 군인이 될 것을 결심한다.
1955년 6월 육사 15기로 입학, 1959년 5월 소위로 임관,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의 사생관을 가지고 死線을 넘나들며 용맹스런 군인으로 성장해나갔다.
사단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시작, 중대장(중위)을 거쳐 방첩부대 특공대장(대위)에 발탁, 많은 공비와 간첩을 검거한다. 베트남전에도 기동대장으로 참전하여 파병 후 최초로 베트콩을 생포, 무공훈장을 받기에 이른다.
1967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침투했다 생포된 공비 중에서 3명을 선발, 3차에 걸친 대북 응징보복작전으로 33명의 적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린다. 1968년, 1·21 청와대 기습사건 때에는 자수한 김신조를 설득하여 공비섬멸에 앞장서고 당진에 침입한 무장간첩 송순영을 체포, 같은 조 성춘경을 사살했으며, 서해안으로 침입한 무장간첩 임관재, 박일근을 사살한다.
1969년 1월에는 남파간첩 김재홍과 고정간첩 김강렬 등 2명을 검거하고, 같은 해 3월, 남파활동 중인 한인동과 일당 9명을 검거한다. 또한 고정간첩 이춘택 일당 5명을 검거하였으며, 1983년 5월 사단장 시절, 심리전을 이용 북한군 13사단 민경대대 참모장 신중철 대위를 귀순시켰으며 1990년 3월에는 험준한 동부전선 최초로 제4땅굴을 발견, 북한의 도발 상을 전 세계에 폭로한다. 3군단장, 1군야전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에 이르기까지 36년의 기간을 보국안민輔國安民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확고한 신념으로 국가안보 능력 확립에 공헌한다. 휴전 후, 최다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에는 체육청소년부장관으로 1992년 1월 알베르빌 동계올림픽(10위)과 바르셀로나 하계올림픽(7위) 최초로 궁도 금메달과 마라톤에서 황영조의 금메달 획득으로 국위선양을 한다. 2008년에는 18대 부여·청양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지역 도로 확충과 국립한국전통문화대학교(석·박사과정)를 부여에 설립하는 등 지역발전에 기여, ‘盡人事待天命’과 ‘至誠感天’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
저자소개
서문
추천의 글
프롤로그
PART01: 악으로 깡으로
PART02: 나의 길
PART03: 장군將軍의 길
PART04: 또 다른 시작
에필로그
이진삼 약력
부록
이진삼 저자가 집필한 등록된 컨텐츠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