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글
우리 시대의 ‘글’은 어떻게 쓰여야 하는가?
우리 시대의 ‘불’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문학, 철학, 신학을 가로지르는 독창적인 사유와 첨예한 언어로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
읽고 쓰기에 관한 거장의 무르익은 사유를 열 편의 보석 같은 에세이로 만난다!
우리 시대 가장 도전적이며 영향력 있는 사상가 조르조 아감벤의 최신작 『불과 글Il fuoco e il racconto』이 책세상에서 출간되었다. 문학, 철학, 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며 첨예한 언어로 독창적인 사유를 펼쳐온 조르조 아감벤은 전 세계에 번역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꾸준히 문제작을 발표하고 있다. 특히 1995년 이후, 이 시대의 폭력, 정치, 삶에 대한 전복적인 사유를 담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 연작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사상가 반열에 오른 그는, 만년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 풍부해진 사유와 필력을 보여준다. 자신의 지적 여정에서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미학적 고찰’로 다시 돌아와, 읽고 쓰기에 관한 무르익은 사유를 담아낸 『불과 글』이 바로 그러하다.
『불과 글』은 문학에 가까운 글쓰기를 보여주는 열 편의 철학적 단상을 묶은 것으로, 「불과 글」 「관료주의적 신비」 「비유와 왕국」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 「소용돌이」 「무언가의 이름으로?」 「이집트에서의 유월절」 「글 읽기의 어려움에 관하여」 「책에서 화면으로, 책의 이전과 이후」 「창작 활동으로서의 연금술」 등, 읽고 쓰기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글쓰기, 모든 언어적 행위가 가지고 있는 비평과 창조, 관찰과 행위의 은밀한 이원론적 측면을 부각시키며 우리의 의식을 날카롭게 일깨운다는 점에서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준다. 오늘날 문학이 잃어버린 ‘불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면서 ‘저항’ ‘무위’ ‘잠재력’을 토대로 하는 창조 행위의 숨겨진 의미를 재발견하도록 이끌고, 나아가 우리의 문학, 우리의 글쓰기가 지향해야 할 미래를 넌지시 암시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문학과 철학, 미학과 신학의 기묘한 동거 또는 놀라운 교유를 확인하면서, 창조 행위의 원천, 그 불꽃에 관해 새로운 통찰에 이르게 될 것이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미학적 시각을 지닌 비평가. 1942년 로마에서 태어나 파리의 국제철학원과 베로나 대학을 거쳐 현재는 베네치아 건축대학 교수이다. 아감벤의 문체가 대단히 신학적이고 철학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그가 분석하는 역사 인식이나 세계관이 너무나 참신하기 때문에 지금 세계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되고 있는 철학자 중의 한 명이다.
스스로 다루고 있는 소재의 내용에서 자신의 내적인 주관성에 관한 표현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 내용의 부정을 무한히 반복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의 내용에 대한 부정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 없는 인간’으로서의 현대 예술가의 운명을 고찰한 미학서인 『내용 없는 인간』( 1970년)을 발표하면서 비평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아감벤은, 『스탄체 ; 서양문화의 언어와 이미지』(1977년)와 『유년기와 역사』(1978년), 『사고의 종언』(1982년), 『언어활동과 죽음』(1982년), 그리고 『산문의 이념』(1985년) 등의 저작들을 통하여 그의 미학적 스탠스에서의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1990년에 발표된 정치철학적 선언서인 『도래하는 공동체』에서 제시되고 있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계급 등을 향한 귀속을 거부하는 ‘주체 없는 주체’에 관한 모델과 매우 닮아 있다.
그밖에도 그의 미학을 둘러싼 이론적 또는 역사적 관심은 발터 벤야민의 이탈리아어판 저작집의 편집 참여와, 1993년 질 들뢰즈와의 공저인 『바틀비 ; 창조의 정식』(1993년)을 통하여 지속되어 왔다. 이후에 아감벤은 구소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를 계기로, 언어활동을 테마로 유럽의 인간적인 조건에 관한 미학적인 고찰에서 정치에 관한 철학적인 고찰로 글쓰기의 이행을 시도한다. 실제로 ‘정체성 없는 단독성’만을 기초로 하는 공동성, 그리고 어느 한 속성으로 인하여 귀속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속성에 대한 무관심을 통하여 각자가 현재의 존재방식인 단독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토대로 공동체 구상을 제시한 『도래하는 공동체』(La comunia che viene, 1990년)를 시작으로, 『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노트』(1995년)에서 제시되고 있는 정치에 관한 현재적 테마들 - 생, 예외상태, 강제수용소, 인민, 인권, 난민, 은어, 스펙터클, 몸짓 등 - 을 통해 아감벤은 정치의 존재론적 지위 회복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 지표가 될 수 있는 개념들을 재고하고 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주목할 저작으로는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1995년), 『예외상태』(2003년), 『아우슈비츠의 남겨진 것』(1998년)의 3부작을 들 수 있다.
불과 글
불과 글, 신비와 서사는 문학이 포기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어떻게 한 요소의 실체가 다른 요소의 상실을 반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명하고 부재를 증언하면서 그것의 그림자와 추억을 필연적으로 상기시키는가?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관료주의적 신비
죄와 벌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와 일치한다. 인간이 감수하는 벌뿐만 아니라 4만 년 전부터(즉 인간이 말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인간을 상대로 끊임없이 진행되어온 재판은 사실 말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가 곧 형벌이다. 언어 속으로 모든 것들이 돌아가야 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죄의 분량에 따라 쇠해야 한다.
비유와 왕국
우리가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말들의 의미, 말들의 모든 모호함과 미묘함을 파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세상과 왕국의 근접성과 유사성을 깨닫는 일이며, 하늘 나라가 우리의 눈으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세상과 너무 가깝고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
모든 사물이 스스로의 존재 속에 보존되기를 욕망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사물은 동시에 이러한 욕망에 저항하며 짧은 순간이나마 욕망을 무위적으로 만들고 관조한다. 관건이 되는 것은 여전히 욕망에 내재하는 저항력, 노동에 내재하는 무위다. 무위만이 예술의 품격을 부여할 수 있다.
소용돌이
액체가, 다시 말해 존재가 취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형상은 물방울과 소용돌이다. 물방울은 액체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와 황홀경에 빠지는 지점에서 발생한다(물은 떨어지거나 흩어지면서 물방울로 분리된다). 소용돌이는 액체가 스스로를 향해 집중되는 지점, 회전을 통해 자신의 바닥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무엇의 이름으로?
부재하는 무언가의 이름으로 말을 한다거나 침묵한다는 것은 하나의 요구를 경험하고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한 형태의 요구는 항상 어떤 부재하는 이름의 요구와 일치한다. 거꾸로 부재하는 이름은 우리에게 그것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것을 요구한다. 요구가 요구하는 것은 사실 어떤 현실이 아니라 무언가의 가능성이다.
이집트에서의 유월절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절기를 이집트에서 보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파울(페자흐) 첼란의 경우, 그가 시를 써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와 그의 시적 과제가 안고 있는 불가능성에 대해 수차례에 걸쳐 이야기한 모든 내용이, 이집트에서의 유월절과 관련지어 검토될 때 특별한 방식으로 빛을 발한다.
글 읽기의 어려움에 관하여
독서가 불가능한 글쓰기가 있는 반면 글쓰기가 없는 독서가 있다. 이 두 가지 경우가 모두 사실 우리에게 굉장히 유사하다. 즉 독서와 글쓰기가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 자체를 뒤흔드는 독특한 독서와 글쓰기의 경험을 우리는 필요로 한다.
책에서 화면으로, 책의 이전과 이후
생각한다는 것은 글을 쓰거나 읽는 동안 백색 페이지를 떠올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질료를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컴퓨터 사용자는 ‘화면’이라는 이 물리적인 장애물, 이 형태 없는 것이 그에게 끝내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남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물질적인 성격에 대한 관념의 허구를 중성화할 줄 알아야 한다.
창작 활동으로서의 연금술
시적인 삶의 형태란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삶일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오로지 작품의 무위적인 상태에 의해서만, 즉 어떤 작품을 통해 하나의 순수한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삶의 형태로 구축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옮긴이의 말_불과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