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노비들 - 천하지만 특별한
사료 밖으로 나온 노비, 조선 서민의 일상을 복원하다!
조선 사회에서 노비는 사극 등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수많은 양인들 가운데 어쩌다 한 번 등장할 정도로 희소한 존재가 아닌,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학계 연구결과에 따르면, 조선시대 노비의 수는 전체 인구 중 최소 30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에 저자는 조선 전체 인구 중 3분의 1을 차지하는 노비의 모습이 곧 조선 서민의 여러 모습 중 하나임을 강조한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이 소개하는 열여덟 명의 노비 모두는, 조선 노비의 삶과 함께 조선 노비제도를 살피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또한 조선 서민의 일상을 복원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사농공상의 벽을 허문 노비, 선비들의 존경을 받다!
조선은 아예 법으로 “노비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공업·상업·병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노비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에게 부과된 의무를 도외시한 채 학문 활동만 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박인수는 중추부지사를 지낸 신발의 노비였지만 학문 활동으로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중종 대의 문신으로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반석평 역시 태생은 박인수와 마찬가지로 미천한 노비였다. 비록 벼슬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시문에 능해 선비들의 인정을 받은 노비들의 사례 역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조선 문단을 풍미했던 백대붕은 선박을 제조·관리하고 물자를 수송하는 전함사의 관노였고, 유희경은 “주인을 충심으로 섬기는” 사노였다.
노비의 재산 보유, 낯설지 않은 조선의 풍경!
신분의 구속, 무거운 의무 등으로 대부분의 노비는 먹고살기만으로도 바쁜 일생을 보냈을 터다. 하지만 일부 노비들 중에는 재산을 축적하여 부자의 반열에 올라선 이들이 있었다. 조선 태종 대에 의흥삼군부의 좌군에 속한 공노비였던 불정은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부자 노비’였으며, 선조 대의 성명 미상인 공노비는 그 당시 한성 최고 기생이었던 ‘성산월’을 차지했을 정도로 “재산이 거만(鉅萬)”이었다.
분명한 점은 부유한 노비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부유한 노비는 전체 노비의 일부에 불과했다. 노비는 주인이나 일반 양인에 비해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동양사를 전공했다. 월간『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편집위원,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방문학자로 활동했으며, 19세기 동아시아 통상관계와 한․중관계사를 연구하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칼럼 ‘김종성의 동북아 진단’과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를 연재했으며, 동북공정 기사와 사극 기사로 오마이뉴스 특별상을 수상했다. 특히 텔레비전 역사드라마 <이산> <대왕 세종> <선덕여왕> 방영 당시 연재한 칼럼은 수많은 네티즌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은 책으로 『조선사 클리닉』, 『동북아 어떻게 볼 것인가』, 『동북아 코드』, 옮긴책으로 『김정일 한의 핵전략』, 『십자가를 짊어진 휴전선 승려』 등이 있다.
글을 시작하며
글 읽는 노비, 박인수
엽기적인 송씨에게 걸린 여종들
신분 세탁으로 재상이 된 반석평
노비가 된 경혜공주
남대문 밖에 사는 정광필의 노비
배 비장을 농락한 제주 기생, 애랑이
서자보다 못한 얼자, 홍길동
노비 막심이 가족의 매매현장
10년치 의무를 이행한 도망노비, 김의동
화폐개혁을 거부한 부자노비, 불정
술주정하다 맞아 죽은 이서구의 노비
대기업 이사급의 노비들
한성 최고 기생을 차지한 공노비
사랑에 실패한 여종, 덕개
재산 목록에 거명된 김무의 노비들
재상을 꿈꾼 천첩의 자식 목인해
추노꾼을 고발한 도망노비들
불상의 눈을 파헤친 한성 동부의 노비들
글을 마치며
주석
참고문헌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