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 두 번째 지도 - 한수영 장편소설
'우리가 살고 있는 콘크리트 세상의 조감도!'
‘고립’으로 연대한 차가운 현실을 따뜻한 응시!
한수영의 장편소설 『조의 두 번째 지도』가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작가 한수영은 「공허의 1/4」로 제2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지 2년 만에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여성 작가들의 역량이 한국 문학을 수놓던 2000년대의 초입에서 ‘한수영’이라는 이름을 세간에 각인시켰다. “확고한 안정감”으로 “현실에 철저하되 상상력으로 그 현실을 입체화”하는 그녀의 붓놀림은 몇 년이 흐른 지금, 이번 작품에서 더욱 농익은 필치로 이 시대의 우울한 조감도를 예리하게 각인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21세기 새로운 조감도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학교와 입시 학원, 빼곡한 고층 아파트촌, 그 사이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맹목적 동선만 그리며 휩쓸린 채 살고 있는 도시 교육 특구와 그곳의 생태계. 어느 날, 눈에 보이지 않는 냉혹한 경쟁 논리 속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는 듯 위태한 발걸음으로 불안한 미래를 향해 한 발을 내딛는 거대 무리 속에서 누군가 그 무리에서 일탈해 공중에서 그곳을 향해 돌진하여 투신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관계를 어떻게 재편할 수 있는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죽음으로 우리가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를 역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도가 아름다운 건 언제든 ‘거기’로 가닿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지”
모두 길을 잃고 향방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작가 한수영이 이번 작품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지도를 보여준다. 땅에 발을 묻고 살기만 하면 절대로 지도를 그려 나갈 수 없다는 듯, 고정된 우리의 시선을 보다 높은 곳에 위치시키기 위해 현실과 상황을 조망할 수 있는 곳까지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객관화시킨다. 그렇게 지상의 표정을 내려다보기 위해 ‘대머리 비둘기’를 소설의 화자로 등장시킨다.
이 메트로폴리탄 보이의 일과는 피뢰침 위에 앉아 저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는 한눈에 조를 알아봤어. 당연해. 녀석이야말로 지도에 대해 뭘 좀 아는 친구거든. _24쪽
이 비둘기의 시조는 다름 아닌 어느 옛 제국의 지도 제작자의 조수였던 것. 그런 피를 물려받은 대머리 비둘기는 비정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으면서, 자각하지 못하는 우리 삶의 모습을 조망한다. 그 모습들은 하나같이 외자의 이름을 가진 소설 속의 ‘표, 한, 모’를 통해 그대로 투영된다, 이들은 차가운 도시의 현실 공간에서 낱알처럼 흩어져 살아가는 자들이다. 오피스텔에서 학원방을 운영하는 ‘표’,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한’, 그리고 공교롭게 형인 ‘조’의 투신을 목격하는 불량 청소년 동생 ‘모.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우연하게도 조의 ’추락‘을 목격하게 되면서 졸지에 서로 모종의 연관 관계가 생긴다. 조가 투신한 이유는 소설에서 불명확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작금의 규명되지 않은 수많은 죽음들, 즉 밝혀지지 않은 ‘불명확성’들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비둘기의 시선으로 조의 죽음을 둘러싼 인물들은 이제 각자의 궤도를 벗어나 새로운 지도를 조금씩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하나의 점으로, 자기만의 좌표를 이루어 살던 이들은 어느 지점에서 서로 겹쳐지기도 하고 빗나가기도 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궤도를 향해 두 번째 지도를 그려나가며 새로운 화해와 자기 이해라는 마음속 지도를 향해 걸어간다.
지금, 적막한 시간을 살고 있는 당신이 그려야 할 두 번째 지도는?
모든 지도의 배후에는 목적이 있단 말이지. 하지만 여기 딱 하나, 목적이라고는 없는, 배후라고는 없는 순수한 지도가 있어. 순수 그 자체인 지도. 조는 자신의 초음파 사진에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어. 조의 첫 번째 지도._85쪽
‘조’는 어머니가 남긴 산모수첩 속 자신의 초음파 사진을 첫 번째 지도라고 생각했다. 지도는 ‘조’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확인하는 일종의 표식이었다. 부모는 곁에 없지만 자기가 어떻게 세상에 그려지기 시작했는지를 확인해주는 초음파 사진은 그에게 있어 자신의 근원을 향해 가는 지도 혹은 ‘시작’의 흔적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지도와 사뭇 다르다. 물리적인 지형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지도는 감정 표시가 배제된 사실적인 지도와는 사뭇 다르다. 물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상상 혹은 이상 세계의 안내 표지만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조가 우리에게 죽음으로 보여준 것은 바로 이런 지도이다.
지느러미가 잘린 상어를 위한 지도. / 다리를 저는 고양이를 위한 지도. / 밀렵꾼에게 이제 막 당한 코끼리의 상아를 위한 지도. / (…) / 너의 발바닥과 볼트의 발바닥 중 어느 것이 더 빠른지 알려주는 지도. / 두 개의 숨소리로 만들어진 지도. / 누군가의 형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지도. _189쪽
조는 자신만의 두 번째 지도를 그리며 사라졌다. 그의 존재는 이 땅에서 분명히 사라졌다. 조의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고립’으로 외따로이 갇혀 있지 말고, 과감히 첫 번째 지도를 뛰쳐나와 두 번째 지도를 향해 주변 사람들과 함께 그려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해설을 쓴 서영인 문학평론가는 “누군가는 추락하고 누군가는 외면하고 누군가는 동요했으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는” 차가운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우리는 결국 “누구가의 고통으로부터 연원”하고 있다는 슬픈 현실의 역설과 그 사실에 대해 이번 한수영 소설이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적인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지도였다면, 이제 자기만의 지형도를 그리며 살아야 할 이들에게 한수영의 소설은 ‘두 번째 지도’를 그리며 나갈 도전적 용기와 유토피아를 선사한다.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2002년 「나비」로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그녀의 나무 핑궈리』와 장편소설 『플루토의 지붕』 등이 있고, 2004년 『공허의 1/4』로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했다.
비둘기의 지도
조의 첫 번째 지도
조의 두 번째 지도
해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