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는가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는가

저자
우치다 다쓰루
출판사
이마
출판일
2018-10-29
등록일
2019-06-19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703 Bytes
공급사
우리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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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당신은 반지성주의자입니까?
무지와 왜곡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 누군가는 그것에서 이익을 얻는 사회

이 책은 최근 더욱 심해져 가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소수자 (집단) 혐오, 그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밑바탕에는 반지성주의와 반교양주의가 있음을 성찰한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과 논객 다수가 저자로 참여하여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적 반지성주의의 역사적, 동시대적 맥락을 살펴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정치인들의 폭언, 문맥이 삭제된 채 선정적으로 유통되는 담론, 음모론, 혐오 발언이 넘쳐 나는 우리 사회에도 적용되는 유용한 진단과 성찰을 줄 것이다.

일본의 지식인들, 반지성주의에 저항하는 법을 고민하다

반지성주의는 단순한 무지나 무교양과 다르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지성에 대한 반발, 아니 공격적인 태도다. 반지성주의적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지식도 교양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특히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_『아사히신문』서평(2015. 4. 17)

아베 정권은 폼을 잡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런데도 국민의 다수는 이 정권을 지지한다. 일본인은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일까.… (이) 논고가 가르쳐 주는 중요한 것. 그것은 반지성주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무심코 무자각 상태에 휘말린다는 것이다. 바보가 되고 싶지 않은 일본인에게 필독서.
_『겐다이 디지털신문』(2015. 4. 14)

◈ 반지성주의 사회, 폭주하는 사회의 이면을 읽다
이 책은 분명히 일본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경고와 성찰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본의 과거사 왜곡, 자위권을 인정하는 헌법개정 움직임과 재일 한국인을 겨냥한 혐오 시위·발언 등 부쩍 심화되고 있는 우경화 움직임을 우리는 걱정스럽게 지켜봐 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일본 사회의 이러한 흐름을 그저 관망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정부의 진실 은폐, 정치인과 미디어의 폭언과 거짓 발언·보도, 여성·성소수자·해외이주민 등 소수 집단을 향한 혐오 발언과 범죄, 사실관계 확인 없이 SNS를 뒤덮고 있는 음모론, 과거사 왜곡 등을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있는 우리도 이미 겪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도착해 있는 사회, 이 책은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반지성주의가 밑바탕에 있다고 진단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는 단순히 지성의 부재나 비지성적인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맹렬한 지적 정열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지성의 작용에 대해 모멸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매우 높은 파급력과 선동성을 지닌 반지성주의는 당연히 사회를 단일한 방향으로 몰아가며,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게 된다. 반지성주의의 실체와 작동 방식을 역사적으로 또한 동시대적으로 살펴본 이 책은 일본의 비판적 지성 우치다 다쓰루가 기획·편집·공동 집필했고, 정치학자, 철학자, 작가, 정신과 의사,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생명과학자 등 다양한 분야와 세대에 포진한 9명의 저자들이 글을 실었다.

◈ 반지성주의에는 사회도 미래도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은 반지성주의 최악의 역사적 사례들로 19세기 후반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20세기 중반 미국의 매카시즘, 일본의 사례로는 군국주의와 이의 왜곡을 두루 지목한다. 반유대주의는 인류사 전체를 유대주의와의 대결로 간단히 규정하고 당시 유럽 사회가 처한 모순의 제공자를 유대인으로 몰아가 이후 20세기에 홀로코스트를 낳았으며, 매카시즘은 미국 정부 곳곳에 공산주의자가 다수 암약하고 있다는 발언이 제대로 된 검증 없이 무려 5년간 정계와 사회, 문화·예술계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공통적으로 성찰과 의문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무시간성’(‘지금, 여기, 나’밖에 없다)과 진부하고 음모론적인 지식의 단순한 반복과 웅변, 사회의 영속성은 안중에도 없는(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를 배제하는) 외곬의 지적 정열이 압도한 사례다.
현재 일본과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혐오 발언과 시위·범죄에도 이러한 반지성주의가 깊이 내재해 있다. ‘재특회’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 ‘일베’에 뿌리 내리고 있는 지역 차별과 여성 혐오는 일종의 사회병리적인 하위문화의 수준을 넘어서 사회 전반의 심상으로 번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사회, 경제적 모순과 그로 인한 박탈감을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원한과 분노로 너무나 손쉽게 치환하는 반지성주의적인 사고와 선동이 있다. 마찬가지로 반지성주의적 정치권력은 이를 적극적으로 권력의 자원으로 동원하거나 활용한다.

◈ 지성을 다시 생각한다
이 책은 반지성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지성’의 역할과 작용을 다시 생각한다. 근대적 지성은 이미 도구적 지성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고, 이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여러 오해와도 관련되어 있다. 지성은 단지 학력이나 지식의 양, 연구나 업무의 성과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이러한 도구적 지성은 분열과 정치적 동원의 계기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한 저자 가운데 특히 흥미를 끄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소다 가즈히로(8장)는 ‘대본 지상주의’와 반지성주의를 연관 짓는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이미 주제를 결정짓고 이에 따라 내용 전개나 인터뷰이의 발언에 관찰자가 부적절하게 개입하는 대본 지상주의는 사회 문제 전반에 깊숙이 개입된 태도이다. 동일본대지진 직후의 일본 정부나 미디어의 대응을 살펴보면, ‘일본의 원전은 사고를 일으킬 리 없다(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안전 신화’의 강력한 대본, 그에 앞서 ‘원전 추진’이라는 정재계, 언론, 학계 등이 연루된 권력 집단의 대본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대본에 없던 사고가 나자 그 대응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최첨단의 지성이 결집된 과학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조작 사건은 지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례이다.
이 책은 반지성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지성의 본래적 작용, 즉 회의하고 질문하고 우리 안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러 있는 힘을 강조한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의 멈추지 않는 열정에 사회 전체가 휘둘리지 않기 위해, 또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 다시 지성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 책속으로 추가 ]

반지성주의를 둘러싼 논의는 지성 같은 것을 축으로 대립한다기보다는 ‘분열’의 서사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현재 이 나라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간을 두 계층으로 분열하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주제는 ‘분열’ 자체에 있다.
집단을 둘로 단절시키는 원흉으로 ‘학력’이 강조된다. 반지성주의 집단이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학력에 의한 분열의 절단면이 성적 서열이라는 지층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 지성을 축으로 대립하다가 그 결과 사람들이 두 진영으로 분열한 것이 아니다. 순서를 따지면 분열이 먼저 생기고, 분열을 발생시킨 요인으로 ‘지성’이 악역을 맡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계속 분열을 겪고 있다. 그 결과 지성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둘로 나뉜 각 집단에 의해 표면화되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는 지성 같은 사소한 것으로 대립하기를 멈추고, 될수록 빨리 제대로 된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제대로 된 사회를 되찾아 현재 진행되는 분열을 저지해야만 한다. _177~178쪽「6장: 지금 일본의 계급적 분열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오래전부터 ‘일본의 원자력발전소는 심각한 사고를 일으킬 리 없다(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안전 신화’라는 강력한 대본을 갖고 있었다. 그 배후에는 ‘원자력발전소 추진’이라는 더욱 포괄적인 대본, 즉 정계와 관료와 학계와 언론이라는 일본의 권력 중추가 공동으로 발전시킨 대본이 있었다. 그래서 막상 대본에 없는 ‘심각한 사고’가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대본의 존재로 인해 일본 엘리트는 지성의 기동을 현저하게 저해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대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성을 철두철미하게 폐기하고,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도록 사고를 정지시키는 도리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지성을 가동시키면 ‘원자력발전 추진’ 시나리오는 붕괴하고 말기 때문이다.
_231~232쪽「8장: 체험적 반지성주의론」

고도로 복잡하고 전문적인 과학에 의한 반지성주의는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다. 그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한층 더 나쁘다. 그 커다란 흐름에 저항하려면 새로운 기술에 지나치게 휘둘리지 말고, 정보 검색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목적에 얽매이는 일을 의식적으로 회피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머리로 똑바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일반인이 과학에 대한 반지성주
의에 빠지지 않도록 똑바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과학의 운용에는 지성이 저절로 따라붙는다는 애매모호하고 낙관적인 선입관에 사로잡히는 것은 과학에 내재한 반지성주의에 가담하는 꼴이라고 말할 수 있다.
_256~257쪽「9장: 과학의 진보에 따른 반지성주의」

한 사회의 중대한 생명은 ‘마찰’에 의해 길러진다는 말입니다. 사회의 각 계층이나 부분은 반드시 나머지를 부가하여 보충해야 할 결함을 갖고 있으며, 그 때문에 발생하는 상시적인 ‘마찰’에 의해 “끊임없이 자극이 편재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평화를 보장”한다고 T. S. 엘리엇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얼크러지는 분할선이 많으면 많을수록 적대감을 분산시키고 혼란시킴으로써 국민 내부의 평화에 유리해지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마찰’을 감소시키고 소거하여 하나의 ‘신앙’으로 균질화하려는 사회는 견인력과 반발력의 긴장감을 잃고 마침내 ‘생명’까지 잃고 맙니다.… 그렇지만 작금에 들어 격차의 심각한 비대화, 걷잡을 수 없는 배외주의의 앙양 등을 보면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그 반대, 즉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시키지 않는 ‘분열의 심화’(사이토 준이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현 정부가 명백하게 원자력발전의 재가동,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집단적 자위권의 용인으로 키를 돌려도, 이를 염려하는 수많은 목소리는 흐릿하기만 할 뿐 잘 퍼져 나가지 않습니다. 연대를 하려 해도 금세 길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개중에도 특히 매개자가 되어 중의를 충분히 모아야 할 야당이 거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분열의 심화’라는 거울에는 필시 가장 가까운 정치적 길을 스스로 찾아내는 기술을 연마하지 못한 우리 자신이 비치겠지요. _263~264쪽「10장: ‘마찰’의 의미ㅡ지성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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