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님, 서툰 그림 읽기 - 장요세파 수녀, 수묵화 속의 공백과 대면하다
장요세파 수녀는 마산 트라피스트 봉쇄 수녀원에서 수도중이다. 수녀님은 세상과의 인연이 다하여야 세상 밖으로 나오는 봉쇄 구역에 있지만, 이 책 수녀님, 서툰 그림 읽기 통해 그림으로 세상과 만나는 특별한 외출을 감행한 것이다.
이글은 수묵화가 김호석 화백의 작품 99점을 해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김호석 화백은 최근 인도 뉴델리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외국인으로서는 두 번째이고,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로 초대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는 1999년 올해의 작가로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2015년 고려대학교 박물관 초대 개인전 등 26회의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는 중견 화가다.
수녀님의 예술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고 은유가 깊다. 글은 오히려 자유롭고 자연스럽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현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때로는 화가가 다가가지 못한 공백 속으로 과감히 진입한다. 수녀님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오히려 우리가 봉쇄 구역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수녀님의 글은 더 줄일 수도 보탤 수도 없는 바로 그런 경지로서 그것은 수묵화가 지향하는 소쇄 담박한 맛과 맞닿아 있다. 신성과 깊이 맞닿아 있는 영성적 존재로서 예술에 대해 이슬 같은 감수성으로 쓴 수녀님, 서툰 그림 읽기는 우리 사회에 선하고 맑은 기운으로 대 긍정의 세계를 지향하도록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한 화가와의 인연이 예술의 담론으로 이어졌다 종교가 닿고자 하는 곳이 예술이 닿고자 하는 곳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한 수도자의 작품평 안에 보이는 길은 익숙함과 새로움이 함께 다가온다. 종교가 지향하는 맑음과 단순함, 비움과 비워짐의 자리는 수묵화에서도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오직 비움을 통해서만 채워지며, 생명을 건네줌으로써만 생명을 얻는 그 길이 수묵화 안에서 새로운 눈을 얻어 표현되고 있는 이 서평들은 오래된 수도의 길이 새로운 표현을 만나면서 어떤 한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그 지평은 너무 밝아 오히려 볼 수 없는 아름다움 같기도 하다가 혹은 인간이 본래 지닌 아름다움과 선함이 죽음과 허무, 핵과 테러, 폭력으로 물든 현대 세계 안에서도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글을 읽는 내내 “사람이여, 그대는 참으로 아름답게 빚어졌으니 부디 그 아름다움을 찾으라.”는 침묵 속의 외침이 행간에서 들려온다.
이렇듯 생명력 있는 글은 35년 수도자의 길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저자 장요세파 수녀는 1984년 일본 홋카이도에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에서 첫 수도생활을 시작하여 같은 수도원이 한국에 창립한 마산 수정 성모 트라피스트에 1989년 귀국하여 지금까지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남녀 불문 봉쇄수도원으로 필수불가결한 일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으며, 새벽 3시 30분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오직 노동과 기도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삶을 평생 살아가는 수도회이다. 노동과 기도, 독서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보다 더한 사막 생활 그리고 사막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공동체 생활, 이 두 가지 흐름은 서로 만나 회오리를 이룰 수밖에 없고 그 회오리에 올라탄 아찔함과 회오리 한복판의 고요함이 이 글 속에 함께 뛰놀고 있다.
생명이 시들어가는 곳에 새 생명을, 전쟁과 테러로 물든 세상에 평화를, 불의와 타협과 거짓이 판치는 곳에는 타오르는 불을, 억압과 착취로 눈물 흐르는 곳에는 자비를 기도함과 동시에, 수도자 자신이 참으로 인간이 되어가는 길, 평화의 사람이 되어가는 길을 추구하는 삶이 김호석 화백의 그림과 만나면서 새 생명을 얻는다.
우리 시대의 현실이 곧 자신이 추구해 나가야 할 예술의 터전이라는 김호석 화백의 그림과 세상의 평화는 자신의 평화와 구분할 수 없고, 세상의 불의에 공모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에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생명, 평화, 자비, 타오르는 불이 되기를 실행해야 한다고 믿는 수도자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물음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붙임-저자서문
글과 문자가 나의 주변에서 멀었던 적은 별로 없었지만, 구체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수도원 입회 직후부터였습니다. 나의 글은 나의 내면의 불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는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의문이 불길처럼 저를 재촉하였고 삶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답을 찾아 오직 그 물음에만 매달렸습니다. 몸부림에도 마음부림에도 그 답을 얻지 못하던 젊은 시절, 그 불길은 내면에서 이리 저리 갈라져 있어 소위 말하자면 나는 너무 뜨거워 미칠 것 같이 폴짝 폴짝 뛰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나는 이 불길을 지긋이 바라보는 한 눈길을 만났고, 각각으로 갈라진 불길은 이 눈길을 향해 하나로 모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 입회 뒤 그 불길은 900년 전통이 전해주는 수도생활의 길 안에서 하나로 합쳐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갈라져 있던 불길이 하나 둘 합쳐지기 시작하자 그 힘은 더 커지고 강해졌습니다. 산산이 갈라져 힘들던 때와 달리 하나로 합쳐진 불길은 사람을 어떤 존재, 초월적인 것, 하느님을 향하게 하기는 하였지만 여린 존재는 그 합쳐진 불길의 뜨거움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뜨거움이 덮쳐오면 마치 그 열기의 힘인 듯 글을 쓰곤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글 체험은 글을 쓰기 위해 고심한다든가 하기보다 그 열기가 향하는 방향을 그대로 쏟아 내놓곤 하는 일종의 영적 체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글은 이 불길이 수도생활이 전해주는 그 길을 향해가는 여정 안에서 솟아 나온 것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1985년부터 2005년까지 20년 동안, 매년 그 해의 마지막 날에 나 자신을 봉헌하듯 한 해의 글을 다 태우곤 하였습니다. 2006년 한 친구로부터 “그 글들이 네 것이냐?”라는 질문 한 마디에 나는 승복할 수밖에 없는 내면의 소리를 따라 글들을 남겨 두기 시작했습니다.
때로 그 불길은 존재의 밑바닥을 향해 내리닫고, 또 다른 때는 위를 향해 춤을 추기도 하며, 존재의 변모를 겪는 시기에는 새삼 두 쪽으로 갈라졌다 다시 합쳐지기도 하고, 하느님 현존의 깊이 속에 잠길 때면 안개보다 고요히 넘실거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 불길은 물길이 되기도 하고 안개, 눈, 바람 무엇으로든 변모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의 이 불길의 체험들이 고스란히 은유라는 형태로 들어있는 김 호석 화백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52점의 작품이 실린 화백의 도록을 만났을 때 저는 마치 물 만난 고기마냥 물속에서 공중에서 산위에서 뛰놀았습니다. 그 뛰논 결과가 여기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오게 된 것은 또한 나에게 불길의 춤을 추게 해줍니다.
현대 미술은 현대인의 혼란, 혼돈, 분열, 병적 증세를 감탄할 정도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작품들 안에 나타나는 인간이란 존재는 거의 재앙과 추악함의 대명사 수준입니다. 플라톤의 정의에 따르면 “시인들은 신들의 통역자”입니다. 이 말은 바꾸어 예술가들은 신들의 통역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예술가들은 현세대의 추악함을 경쟁이라도 하듯 묘사하거나, 탐미적으로 그저 아름다움만을 묘사하는 양극으로 나뉘는 듯 하며 양쪽 모두 인간에게 신들의 통역자로서 삶의 미와 초월적 세계에 대한 고찰을 전해주지 못하는 듯 합니다.
이런 세태 안에 김 호석 화백의 작품 안에 드러나는 정신세계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역사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난 속에서도 찌부러지지 않는 고귀한 인간의 모습, 분노할 수밖에 없는 정치 풍토와 그 희생자들, 가족, 동물, 벌레, 그리고 종교적 영적 세계로까지 스펙트럼이 엄청납니다. 각 테마 안에는 깊은 성찰과 삶의 의미 추구를 통한 줄임과 통합의 결과인 각각의 다른 불길들이 일렁이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존재, 아니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이 불길이 나의 불길과 만나 또 다른 불꽃과 불향이 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1958년 2월 19일 출생.1984년 12월에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에 입회. 현 마산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봉쇄수녀원에서 수도중
(☞봉쇄수녀원이란? : 트라피스트 수녀원은 ‘엄률시토회’ 소속이다. 엄률시토회는 17세기 프랑스에서 창설됐다. 이곳 수녀들은 새벽 3시30분 기상해 밤 8시 불이 꺼질 때까지 기도와 독서, 노동으로 수도를 한다.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장요세파 수녀는 딱 한 번, 2007~2009년경에 환경운동 문제 때문에 로마에 있는 수도회 총장 신부의 허락을 얻어 외부 활동을 한 바 있다.)
저자 소개
불꽃과 불향으로 피어나기를
황희 정승
마지막 농부의 얼굴
세수하는 성철 스님
성철 스님
시선의 바깥
물고기는 알고 있다
독무대
관음
덫1, 2
하늘에서 땅으로
풀들은 늙지 않는다
법
보이르 호수
비상
단잠
독수리
서(鼠)
날 수 없는 새
키 재기 꿈꾸기
하늘
기억의 빈자리
전체보다 큰 부분
생성
소리를 듣던 날
나무꾼 대선사
소
통하라
칼눈
거미줄
나는 너다
빛 속에 숨다
잘못된 선택 올바른 선택
이성의 법정에 세우다
180도가 넘는 삼각형
정신은 뼈다
영혼
아포토시스
콩 심은 데 콩 난다?
껍데기
겨울 매미
신체 없는 정신은 가능한가?
한밤의 소
물을 탁본하다
불가능의 가능성
법의 한가운데
매창
지나가니 새것이 되었다
두 개의 눈
말이 살이 되었을 때
도둑고양이
팥 심은 데 팥 난다
9년의 시간
불이
기억은 기억한다
마른 기억에 다가가기
불이 2
빛1, 2
늑대가 오는 밤
밤송이
성철 스님
백범 김구
답 없는 날
김구 데드마스크
풋!
포로
독수리
대지의 마지막 풍경
어머니
전봉준
휴식
하늘에 핀 꽃
아파트
깨진 하늘
내음으로 기억되다
익숙함의 두려움
염소
날숨
안간힘
분노를 삭이며
이제는 의자가 쉬자
수박씨 뱉고 싶은 날
천국의 아이들
어휴 이뻐
하늘의 애도
소녀
바람의 숨결
통쾌한 공포
속꽃
샤먼
낯설고도 친밀한
배추의 꿈
칼끝에 묻은 꿀
새참
올바른 선택을 위한 잘못된 선택
농부 아저씨 김씨
화삼매
그림자에 덧칠하다
불가능의 가능성
민초
추천사
장요세파 저자가 집필한 등록된 컨텐츠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