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엣말
<귀엣말> 다인은 발소리를 죽여 민설의 뒤로 다가갔다. 탄탄한 어깨가 왠지 외로워 보이는 건 무슨 까닭일까. 손을 뻗어 어깨를 따뜻이 토닥여주고 싶다. 남자에게서 결핍된 어떤 부분이 들여다보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결핍이 정서적인 영역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그걸 자신의 손으로 채워주고 싶어진다면 위험의 한계치에 이르러 있다는 의미. 이리로 걸어올 땐 살금살금 손 뻗어 두 눈 가리는 장난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방금 마음에 감지된 위험신호를 어떤 형태로 소화해야 좋을지 몰라진 다인은 음음, 소리로 기척을 냈다. 곁을 내어줄 거냐, 허락이라도 구하듯. “앉아요.” 돌아보지도 않고서 민설이 말했다. 다인은 민설 곁에 앉았다. 흐르는 물도 낚싯대 끝에 돋아 오른 찌도 평온했다. “왜 빈손이지?” “아차.” 마실 걸 가져오겠다 해놓고 민형과 얘길 하느라 잊어버린 거다. “못됐어. 혼자서만 주스 마시고.” 장난기 실린 민설의 어투가 정겨워 다인은 생긋 웃었다. “가져올게요.” “됐어요.” “치, 못됐다며?” 민설이 낮게 웃었다. 웃음을 지닌 옆얼굴이 온화하다. 못마땅해 있다 여겼던 건 역시 착각이었나 보다. 하긴 그럴 리가 없을 테니. “도시락 싸왔어요. 이따 민형 씨 일어나면 같이 먹어요.” “김밥?” “네.” “라면은?” “라면?” “라면 잘 끓인다면서.” 다인은 아하하, 웃었다. “고기 다 도망가겠네.” 건조하게 내던지는 민설의 말이 무안하거나 거슬리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까칠한 핀잔으로 들렸을 터인데. 한 마디 내어놓고는 꾹 다물어진 민설의 입술이 눈 안에 쏙 담겼다. 더불어 다인의 가슴 속에서 빨간 불이 위태롭게 반짝거렸다. 다인은 민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물을 바라보았다. 물 위로 햇빛이 내려 잔잔히 떠다녔다. 이따금 여린 바람이 귓가로 귀엣말처럼 소곤소곤 스쳐가곤 했다. 가슴 속을 불안하게 떠돌던 불빛들이 차분히 스러졌다. 그제야 다인은 민설을 돌아보았다. 순간, 다시금 가슴에 불이 켜졌다. 자신에게로 와 있는 민설의 눈빛. 언제부터였을까. 방금 돌아본 것 같지는 않았다. 제법 오래 고정되어 있었다는 느낌. 다인은 미소 짓지도 못하고 스르르 고개를 돌려버렸다. 가슴 안에서 하프 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다.
김지운 봄을 좋아한다. 단편소설 ‘그 여자’로 동서커피문학상을, ‘손톱’으로 <생각과느낌> 신인상을, 장편소설 <오르골>로 신영사이버문학상을 받았다. 몇 년 동안 소설만 써오다가, 작년부터는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장편동화 <엄지>로 MBC창작동화대상을, 단편동화 ‘오늘은’으로 푸른문학상 [새로운작가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오르골>, <햇빛 아래 그가 있다>, <계절사랑 시리즈>, <이끌림>, <느낌>, <포옹>, <당신의 숲> 등이 있으며, 장편동화 <엄지>와 동화집 <나의 철부지 아빠>(공저), 그리고 시 ‘봄날’로 지하철시집 <행복의 레시피>에 참여했다. 현재 소설과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쓰고 있으며, 다양한 빛깔의 삶과 사랑과 사람을 그리고 싶다.
01 02 03 04 05 06 07 08 09 10 11 12 13 다솜의 일기 소곤소곤, 그들의 이야기 작가의 말 외전 / 또 하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