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에 관한 편지
정치와 종교를 향한 통렬한 비판
2004년 모 대통령의 ‘수도 서울 봉헌’ 파문은 종교적 자유와 세속적 자유를 혼동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로크에 따르면 이 사건은 통치를 신의 은총으로 정당화하므로 모순이다. 정치에 대한 종교의 지배, 더욱이 특정 종파의 지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지배는 종교 자체의 파괴이고 구원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로크는 그것이 ‘그리스도교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세속적 권리와 종교적 자유를 혼동한 사례는 인류 역사상 비일비재했지만 17세기 유럽은 그 절정의 시공간이었다. 당시 프로테스탄트는 자유를 위한 권리를 주장했고, 이런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가톨릭의 탄압이 이어졌다. 로마 가톨릭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구세력은 종교적 자유와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프로테스탄트를 정치적 종교적으로 박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 지식인들은 저마다의 종교적 입장에 따라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관용에 관한 편지)는 이 당시 경험론 철학의 선구자인 로크가 정치와 종교의 구분을 주장하는 입장을 드러낸 저작이다.
로크는 구원에 대한 믿음으로 위장된 종교의 지배 욕망을 비판하고, 그리스도교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시키려 했다. 그는 종교적 지배 현상이 정치와 종교, 공화국과 교회를 구별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두 영역 간의 경계를 허무는 데에서 비롯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두 사회의 구별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 권력이 어디까지나 인민의 지지에 기초한다고 믿었던 그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진 정치적인 정체성과 종교적인 정체성이 구분되지 않은 채 다수가 다수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통치할 때, 그 국가는 정치적 통치뿐만 아니라 종교적 지배까지 하게 된다고 말한다. 동의에 근거한 정당한 통치가 아닌 자의적인 지배가 생겨나고, 이렇게 되면 ‘인민 전체의 재산res populi’을 의미하는 ‘공화국res publica’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로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정체성인 시민적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각각 공화국과 교회의 영역에 국한시킨다. 이로써 종교적 다수가 그대로 정치적 다수가 되어 소수를 억압하지 못하고 나아가 종교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로크의 주장은 후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옹호한 것처럼 종교에서도 국가교회라는 독과점 시대가 끝나고 교파교회라는 자유 경쟁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용과 자유를 위하여
로크는 종교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종교나 민족, 언어가 아니라 시장 질서이다. 국가에 대한 시장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국민들의 시민적 자유는 물론 종교적, 언어적, 문화적 자유마저 침해받는다. 교회가 국가를 지배할 때에 시민적 자유는 물론 종교적 자유도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 영어가 지배적인 언어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이 언어를 사용하는 혹은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다수로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여 그들의 언어적 정체성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관용이 뿌리내릴 수 없는 시장이 정치뿐 아니라 다른 영역마저도 지배하여 시장 질서의 다수 공동체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기계적인 중립을 취하거나 방기하는 것은 사실상 종교와 언어, 민족과 문화에 대한 시장의 전제적 지배를 허용하는 것이다. 불신자를 개종시키려면 아무리 강한 부대도 신의 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로크의 말은 관용 없는 거짓 믿음이 결국 신에 대한 모독으로 이어진다고 비판한 것이다. 다수라는 이름으로 권력이 관용 없는 횡포를 부릴 수 있다는 로크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관용의 눈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1632년 영국 남서부 서머싯의 청교도적인 국교회 집안에서 태어나 변호사인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열 살 되던 해인 1642년 영국내전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치에 눈을 떴고, 스무 살인 1652년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철학, 언어학, 논리학, 윤리학, 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다. 1658년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옥스퍼드 대학에서 지도교수가 되어 그리스어와 수사학, 도덕철학을 가르쳤다. 동시에 실험과학과 의학에도 큰 관심을 가져 의학 특별연구원이 되었는데 그 명성이 상당했다.
당대 유명한 정치가이며 휘그당의 창시자인 애슐리 경(섀프츠베리 백작)의 주치의가 되면서 영국의 정치에도 관여했고, 그의 아들의 가정교사, 고문으로도 일했다. 그러나 애슐리 경이 반역죄로 몰려 네덜란드로 망명하게 되자 위기를 느낀 로크도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이 기간 동안 자녀교육에 관한 글을 친구에게 써보냈는데, 그것이 교육론의 원고가 되었다.
1689년 제임스 2세가 쫓겨난 명예혁명 후에 영국으로 돌아온 로크는 외교관 자리를 거절하고 영국 정치와 종교를 관용의 문제로 다룬 《관용에 관한 편지》를 썼다. 말년에는 조용히 은거하면서 휘그당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며 《통치론》, 《인간지성론》 등을 집필했다. 1704년 경건하게 살아온 72년의 삶을 조용히 마감했다.
영국경험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진보적 사상가였던 그는 오늘 날에도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학·심리학·교육학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사회·정치사상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프랑스혁명 정신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
1632년 변호사인 존 로크 1세의 아들로 출생
1646~1652년 웨스트민스터 기숙학교 수학
1652년 옥스퍼드 대학 크라이스트 처지 칼리지 입학
1656년 학사학위 취득, 옥스퍼드 대학 튜터 임용
1658년 석사학위 취득, 강사 임용
1665~1666년 월터 베인 경의 독일 공사 서기관
1672년 샤프츠베리 대법관의 공보비서
1675년 대외무역위원회 서기장
1675~1679년 프랑스에서 대표작인 『인간오성론』 집필
1683~1689년 네덜란드 망명
1689년 세금항소위원회 위원
1690년 공소원장
1700년 정계 은퇴
1704년 사망
주요 저서
1689년. 『관용에 관한 서한(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1690년. 『관용에 관한 두 번째 서한(A Second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1692년. 『관용에 관한 세 번째 서한(A Third Letter for Toleration)』
1689/90년.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89/90년.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93년. 『교육론(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
1695년. 『기독교의 이치(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들어가는 말
1689년 포플의 서문
관용에 관한 편지
1. 도입
2. 공화국과 교회
3. 관용의 의무
4. 교회의 권리
5. 결론-종파들과 국가의 안전
6. 부록-이단과 종파 분리
해제-존 로크, 종교의 자유와 공화국의 자유를 함께 추구한 사상가
1. 17세기 잉글랜드와 로크의 일생
2. (관용에 관한 편지)가 주장하는 관용과 자유
3. 21세기 지구화 시대의 (관용에 관한 편지)
주
더 읽어야 할 자료들
옮긴이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