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나비, 살랑거리다 - 홍양순 소설집

나비, 살랑거리다 - 홍양순 소설집

저자
홍양순
출판사
실천문학사
출판일
2012-11-01
등록일
2012-12-27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594 Bytes
공급사
우리전자책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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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삶의 불가해성에 맞서는 서사의 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홍양순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날로 황폐해져가는 가족의 운명을 그린 첫 소설집 『자두』에서 작가가 보여주었던 진실성 짙은 묘사는 이번 소설집에 들어와 더욱 핍진해졌고, 문장과 플롯은 한층 간결하고 탄탄해졌다. 『나비, 살랑거리다』에서 홍양순 작가는 삶의 상처와 마주하는 것이 소설의 운명이라 여긴다. 그리고 곧 삶의 상처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소설가 오정희는 “홍양순 소설에는 겨우겨우 숨쉬는 존재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가득하다. 단순히 소외된 자, 깊이 상처받은 자, 사회적 부적응자라고 명명하는 것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가녀린 인물들은 어느 먼 별에서부터 이 세상에 불시착한 사람들처럼 낯설고 불안하고 위태롭다.”라고 평하며 홍양순 작가가 불러내는 인간군상들의 면면을 환기시킨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개가 염소를 낭떠러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염소는 여자가 숨을 멈춘 사이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절묘하고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틀었다. 검둥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유유히 걸어서 여자에게로 돌아왔다. 잠시 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자는 이번엔 많이 놀라지 않았다. 유심히 보니 염소는 개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개에게 접근해 뒷발로 툭툭 장난을 걸기도 했다. 개에게도 적의라고 할 것은 손톱 끝만큼도 없어 보였다. 염소가 다가오면 주위를 겅중겅중 뛰며 도리어 상대를 즐기는 것 같았다.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저렇듯 벼랑 끝에서 벌이는 곡예와 같은 놀음은 아닐까. 여자는 검둥개와 염소의 무심한 장난을 보며 왠지 그럴 거라 믿고 싶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여행객들의 떠도는 소리와 함께 경운기 소리가 털털털 들려왔다. 섬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그의 말대로 아무 짓도 저지를 수 없는 섬이었다. (-?마라도? 中)

다채로운 여덟 편의 이야기들 속에서 주요하게 반복되는 모티프는 바로 ‘상실’이다. ‘가족’과 ‘노동’의 주체되기를 상실한 소설 속 인물들은 매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교편생활 사직과 전자제품 대리점 사업에 실패한 후 낯선 공단 내 학교의 영어 주임을 맡은 남편, 그마저도 공장 노동자들의 활동을 도와 사측과 갈등을 빚는 남편 곁에서 현실에 대한 무기력감으로 자신을 “황량한 사막”과 동일시하며 “서서히 소멸되고 있”는 아내의 삶은 바로 ‘벼랑 끝 곡예’와 다를 바 없다(「미망迷妄의 집」). 그런가 하면, 백화점 관리부서에서 일하다가 정리해고된 여자도 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죽음으로 인해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져 그녀는 서둘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지만, 밀린 방값 때문에 주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는다(「미스터리 시간」). 이밖에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손녀를 키우기 위해 무가지 신문을 주워다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그네 씨(「필녀必女」)와 구조조정을 앞둔 심리적 부담을 아로마테라피 향기로 다스리는 남자(「포푸리를 만드는 남자」) 등. 이렇듯 『나비, 살랑거리다』에 등장하는 작중인물들은 구체적 양상이 다를 뿐 삶의 빈곤과 무기력, 그리고 허무의 모습들을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다.
그들은 삶의 난경(難境)을 벗어나기 위해 죽을힘을 다 쏟지만, 현실을 벗어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은 차라리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젖어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삶을 포기하는 것도 결코 녹록지 않다. 온전히 살지도, 온전히 죽지도 못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고통스럽고 비루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억척스레 이것들을 살아내는 ‘곡예’를 보여준다. 작가는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존재들이 갖는 ‘생명력’에 주목한다. 작품 속에서 ‘생명력’은 때로 삶의 비루함에 굴복하지 않는 초월적 의지로 그려지기도 하고, 혹은 현실에 대한 아집과 만용으로 똘똘 뭉친 무모함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작가는 깊게 패인 상흔과 연루된 작은 것들의 ‘사이’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삶의 상처와 마주하고 아파한다. 알 수 없는 통점들이 곳곳에서 아우성을 쳐온다. 하지만 결국 고통들의 존재들이 서로 유대하고 관계를 맺어가면서 우리 삶의 어느 순간은 상흔들을 훌쩍 뛰어넘기도 한다. 작가가 우리에게 그 많은 인물군상을 소개시켜 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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